오바마 미국 대통령 농구 캐리커쳐 모습
정치리더들

오바마 미국 대통령

농구에서 정체성과 자신감을 찾다

한 소년이 외할아버지와 함께 하와이 대학의 농구 경기를 보기 위해 농구장을 찾았다. 거기서 소년은 놀라운 광경을 목격했다. 경기 시작 전 몸을 푸는 흑인 선수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은 자신감으로 똘똘뭉친 전사 같았다. 더 이상 백인들에게 의심 받고 손가락질 당하는 흑인이 아니었다. 농구장을 가득 채운 많은 관중들은 그들의 몸짓 하나하나에 열광했다. 소년의 눈에 흑인 선수들은 전사이자 영웅이었다. 나도 저 흑인 선수들처럼 되고 싶다!’ 검은 눈을 반짝이며 농구 선수를 열망하던 소년이 바로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 오바마이다.

버락 오바마는 1961년 8월 4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태어났다. ‘버락’이라는 이름은 ‘축복 받은’이란 뜻이지만, 그의 어린 시절은 부모의 이혼과 재혼으로 축복과는 거리가 멀었다.

케냐 루오족 출신인 오바마의 아버지 버락 오바마 시니어는 케냐 정부와 미국 후원자들의 도움으로 유학 온 하와이 대학의 첫 아프리카 학생이었다. 경제학을 전공하던 그는 캔자스 출신 백인 여학생 스탠리 앤 던햄과 사랑에 빠졌고, 던햄 아버지의 반대를 무릅쓰고 결혼하여 오바마를 낳았다. 하지만 오바마가 두 살 때 그의 부모는 이혼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의 집에서 살게 된 오바마는 인종 문제로 갈등을 겪게 되었다. 오바마는 흑인 아버지와 백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고, 인도네시아인 새아버지 밑에서 지내기도 했기에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혼란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흑인을 향한 사회의 편견과 차별도 겪어야 했다.

항상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고 방황하던 오바마는 농구장의 흑인 선수들처럼 농구 선수가 되면 자신감이 생길 것 같았다. 흑인이라는 열등감을 떨칠 수 있는 실마리를 찾은 것이다.

그날 이후 오바마는 아버지가 선물해 준 오렌지색 농구공을 들고 아파트 공터에서 혼자 농구를 하기 시작했다. 농구 코트에서 검은 피부는 결코 약점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오바마는 고교 농구부원이 되었고 농구로 인정받고 싶어 했다. 그러나 실상은 경기에 나가지 못하고 벤치를 지키는 벤치 워머(Bench warmer)신세일 때가 많았다. 뉴욕에서 온 백인 코치는 흑인을 비하하는 말을 입에 달고 살았다. 오바마는 자신의 실력을 인정해 주지 않는 코치에게 불만이 많았다. 그 사이 술과 담배, 마약에도 손을 대며 방황을 하기도 했지만 오바마는 농구를 하면서 자신을 이겨 냈다. 후보로 있으면서도 실망하지 않고 팀의 일원으로 묵묵히 연습에 열중해서 실력을 쌓아 나갔다. 연습벌레로 한참을 지낸 뒤에 결국 폭격기(Bomber) 같은 슛을 날린다 하여 ‘오, 바머(Oh, bomber)’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실력을 인정받게 되었다.

이처럼 오바마가 자신의 정체성의 혼란을 느끼고 방황할 때 그에게 결정적 도움을 준 것이 ‘농구’였다. 농구를 통해 ‘아버지가 흑인이냐 백인이냐’가 아니라 ‘자신이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자신을 만든다는 것을 비로소 깨달았다.

 

농구를 하며 리더십과 인맥을 쌓다

오바마는 고교 졸업 후에도 각양각색의 사람이 모이는 동네 농구를 늘겼다. 오바마는 “공정하지 않으면 싸움이 난다. 팀 전원이 책임감을 가져야 경기에서 이길 수 있다.”며 농구를 하면서 분쟁 해결 능력과 감정 조절, 다른 사람의 얘기를 들어줄 줄 아는 리더의 면모를 키워나갔다. 오바마가 하버드 대학 로스쿨 편집장이 될 수 있었던 것도 동네 농구에서 통합 능력과 리더십을 배운 덕택이라고 털어놓았다.

심지어 오바마는 농구로 정치에 필요한 인맥도 쌓아 나갔다. 처음 오바마가 사회 운동에 뛰어들었을 때 빈민가 사람들에게 호감을 얻을 수 있었던 것 역시 농구였다. 시카고 대학에서 농구를 하다 만난 학생들은 대선 때 그의 참모가 되어 주었다.

농구는 결혼에도 도움을 줬다. 부인 미셸 오바마는 어릴 때부터 아버지에게 “농구는 누가 ‘이기적인 멍청이’ 인지 금방 가려낼 수 있다.”는 말을 귀가 따갑게 듣고 자랐다. 그래서 미셸은 결혼을 결정하기 전, 오리건 주립대 농구 감독인 오빠에게 오바마가 어떤 사람인지 농구 시합을 하며 알아봐 달라고 부탁했다. 결과는 물론 합격이었다. 미셸의 오빠는 자신의 농구 팀 동료였던 재계 인사들을 오바마에게 소개해 주었고, 이들은 선거 자금 마련에 큰 도움을 주었다.

또한 대선 기간 동안 농구하는 오바마의 모습은 긍정적인 이미지를 만드는 데 크게 기여했다. 친근한 농구 이미지로 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기선을 제압한 것이다. 결국 오바마는 농구의 인기가 좋았던 인디애나와 노스캐롤라이나 지역 선거에서 이기면서 힐러리를 꺾었다. 존 매케인과 경쟁한 대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농구선수 출신인 오바마 캠프의 선거 전략가는 “유세 도중 농구를 한 곳에서는 이겼고, 농구를 하지 않으면 졌다. 이후 모든 지역에 유세를 가면 꼭 농구를 했다.”고 고백할 정도였다. 오바마 선거 캠프엔 10여명의 농구 선수 출신이 있었고, 내각에도 6명의 농구인이 진출했다. 이렇게 농구는 오바마의 정치 기반을 마련하는 바탕이 되었고, 잿빛인생을 밝고 희망적인 미래로 바꾸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인생을 바꾼 ‘매일 운동’

오바마는 농구 외의 운동도 무척 열심히 한다. 운동을 거르는 날이 거의 없다고 한다. 선거 다음날에도, 추수감사절에도, 심지어는 대통령에 당선된 뒤 처음으로 백악관을 방문하던 날에도 체육관을 찾았다. 오바마가 미국 최초의 흑인 대통령의 위치까지 오르는 데에는 이처럼 운동을 통한 끊임없는 자기 관리가 있었다.

콜롬비아 대학 교환학생으로 기대에 부풀어 뉴욕에 갔던 오바마의 눈에 뉴욕은 너무 화려해서 절제하지 않으면 욕망의 노예로 변하게 하는 묘한 힘을 가진 도시로 비쳤다. 오바마는 뉴욕을 바라보며 커다란 결심을 했다. 여러 가지 모순이 존재하는 이 세상을 변화시키겠다고. 그렇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먼저 나태했던 자신부터 혁신적으로 바꾸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그때부터 오바마는 그동안 몸에 배어 있던 좋지 않은 습성들을 버리기 위해 매일 5킬로미터씩 달렸다. 일요일은 단식을 하며 자신의 몸을 단련했다. 그리고 아주 열심히 공부에 매달렸다.

이렇게 시작된 오바마의 ‘매일 운동’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꿨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있어 운동은 절대적이다. 운동하는 시간이야말로 남의 방해를 받지 않고 생각을 정리하고,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다. 잠을 줄이는 한이 있어도 아침 운동은 건너뛰지 않는다.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 가장 먼저 하는 것이 운동’이라고 밝힐 정도다. 그렇기에 오바마의 보좌진은 아무리 바쁜 일정이라도 운동할 시간을 만들기 위해 애쓴다.

매일 아침 체육관에서 90분간 운동을 하는데, 절반은 근력을 키우는 웨이트 트레이닝에 투자하고, 나머지 시간엔 심장 기능을 강화하는 고정식 자전거 타기나 러닝머신을 즐긴다. 또 매일 5킬로미터씩 뛰는 것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운동은 오바마에게 있어 단순한 체력 관리의 도구가 아니라, 긍정적인 삶의 자세를 가지도록 도와주는 중요한 요소이다. 오바마에게 운동은 자기 변화의 다른 이름인 셈이다.

 


Behind Story

미국의 스포츠 대통령들

미국 유권자들은 대통령 후보를 평가할 때 스포츠에 큰 비중을 둔다. 즉 허약한 대통령을 싫어한다. 대통령의 운동 능력이 용기, 남성성, 정치적 능력과 연관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스포츠 대통령의 전통은 건국 초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초대 대통령인 조지 워싱턴은 승마와 걷기를 즐겼다. 제2대 대통령 존 애덤스는 매일 아침 수영을 즐겼는데 포토맥 강에서 알몸으로 수영하다 발각되기도 했다.

수준급의 산악자전거 실력을 자랑하는 부시 전 대통령은 주말마다 친구들과 자전거를 탄다고 한다. 또한 마라톤에도 일가견이 있어서 취임 전 마라톤 최고 기록이 3시간 40분대였다. 부시 전 대통령의 아버지인 조지 H. W. 부시 전 대통령 역시 손꼽히는 스포츠 대통령이다. 그는 필립스 아카데미 재학 시절 농구, 축구 팀 주장이었으며 예일대에서도 농구부 주장을 맡았다. 80세 생일에는 고공낙하에 성공할 정도로 여전히 스포츠를 즐기는 면모를 과시했다.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은 매일 아침 5킬로미터씩 조깅을 했으며 시어도어 루스벨트 전 대통령은 테니스광으로 백악관에 테니스장을 만든 장본인이다. 존 F. 케네디 전 대통령은 수영과 미식축구, 요트 타기를 즐겼으며 제럴드 포드 전 대통령은 미시간대 재학 시절 미식축구 선수로 뛰었다.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수영장 구조원으로 일했을 정도로 수영 실력이 뛰어났다.


 

참조: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댓글 2개

답글 남기기

이메일 주소는 공개되지 않습니다. 필수 필드는 *로 표시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