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탁구치는 모습
정치리더들

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탁구 외교를 펼치다

13억 인구의 최고 지도자이자 세계 파워 리더 2위! 중국의 후진타오 국가주석은 부드러운 인상과 예의 바른 매너를 지닌 명석한 두뇌의 타고난 리더로 정평이 나 있다. 겉보기에 점잖고 책만 읽는 서생타입인 그가, 2008년 5월 일본을 방문해 180도 다른 모습으로 일본 국민들의 눈길을 사로잡았다.

후진타오 주석이 중국 지도자에 오르고 10년 만에 처음으로 일본에 공식 방문하는 것이었다. 후진타오 주석은 일본의 명문 대학인 와세다 대학교에서 특강을 마친 뒤, 후쿠다 야스오 일본 총리와 함께 일본 여자 탁구 선수인 후쿠하라 아이와 올림픽 금메달리스트이자 중국의 간판스타인 왕난 선수의 탁구 시합을 관람하였다. 관람에 이어, 후진타오 주석은 양복 상의를 벗고 소매를 걷어붙인 뒤 곧바로 후쿠하라 아이 선수와 친선 경기를 가졌다.

호기심을 갖고 경기를 지켜보던 관람석에서 탄성이 흘러 나왔다. 후진타오 주석은 빼어난 감각과 실력으로 세계 정상의 일본 탁구 선수에게 강력한 스매싱 공격을 펼쳐 보인 것이다. 연이은 스매싱 공격과 접전 끝에 8세트 경기에서 5세트를 이기는 놀라운 실력을 보여 주었다.

친선 경기에 이어서 왕난과 후쿠하라 아이 두 선수가 참여하는 친선 복식 경기가 이어졌다. 당초엔 후쿠다 총리와 왕난이 한 조가 되고, 후진타오 주석과 아이 선수가 한 조를 이루어 경기가 진행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앞서 후진타오 주석의 실력을 직접 본 후쿠다 총리는 라켓을 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고, 대신 심판을 볼 예정이었던 일본 탁구협회 부회장이 후진타오 주석과 편을 이뤄 복식 경기를 치렀다.

경기가 끝난 후 후쿠다 총리는 상기된 표정으로 “후진타오 주석이 프로 선수를 능가하는 실력을 보여 주었다. 오늘 내가 후진타오 주석과 탁구 시합을 하지 않은 것이 천만다행이다.”라고 말했다.

친선 경기를 마친 후진타오 주석은 후쿠하라 아이 선수와 가볍게 포옹하고, 두 선수의 탁구 라켓에 사인을 했다. 이어 즉석연설을 하면서 중일 양국 청년들이 운동을 통한 교류가 많아져야 됨을 강조했다.

중국과 미국, 중국과 일본 등 서로 외교가 단절되어 있던 시절, 서슬 퍼런 냉전의 벽을 허물고 대화의 물꼬를 튼 ‘핑퐁 외교’ 이후, 중국은 다시 한 번 ‘핑퐁 외교’의 저력을 보여 준 셈이다.

 

최고 지도자의 비결은 체력

후진타오 주석은 1942년 상해에서 태어나 장쑤성 타이저우에서 자라났다. 그는 5살 때, 2살이나 일찍 초등학교에 입학하였고, 7살때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두 여동생을 돌보며 학교에 다녀야 했다. 항상 단정하고 모범생이었던 후진타오 주석의 어릴 적 꿈은 ‘의사’였다고 한다. “의사가 되어 ‘동아시아의 나약하고 병든 환자’ 라고 손가락질 받는 중국 인민들을 위해 봉사하고 싶다.”란 것이 그의 다부진 장래 희망이었다.

후진타오 주석은 꿈을 이루기 위해 항상 성실하게 공부하고, 또 운동도 소홀하지 않았다. 체력이 되지 않으면 그의 희망도 물거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59년 중국의 명문 대학인 칭화 대학 수리공정학과에 입학하여 이제까지 접하지 못했던, 여러 가지 운동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당시 칭화대는 미국인 체육 주임 교수를 영입해서, 그의 주도하에 체육관을 짓고 학생들의 재학 기간 동안 농구, 배구, 야구, 체조, 수영, 육상, 씨름 등 다양한 종목을 경험할 수 있게 하였다. 서구의 운동들이 거의 소개되지 않았던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시설과 프로그램이었다. 이후 칭화대의 운동 프로그램은 다른 중국 대학교의 기준이 되었다. 또한 “칭화 대학교의 어느 학생이든 졸업하면 모두 체육 교사가 될 수 있다.”는 말이 생길 정도로 칭화 대학 졸업생들의 운동 실력은 사람들의 인정을 받았다.

칭화 대학 시절 후진타오 주석은 다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각종 운동을섭렵했는데, 특이한 점은 무용에 큰 관심을 보여 무용단에 들어가 활약했다는 점이다. 그는 무용대 대장과 예술단 단장으로 당선되기도 했다. 어릴 때부터 노래 실력도 출중했다고 알려졌는데, 노래와 춤 실력을 겸비하여 수준급 공연을 펼치기도 했다고 한다.

무용은 팔, 다리는 물론 온몸의 유연함을 전제로 고된 연습이 필요한 종목이다. 따라서 운동량이 큰 활동이면서 유연성을 기르기에 안성맞춤이다.

문화대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학 생활을 보낸 후진타오 주석은 1968년 간쑤성 융칭 현에 있는 류지아샤 댐으로 직장 발령을 받았다. “인민으로부터 배워라!” 라는 마오쩌뚱의 교시에 따라 변방의 황량한 시골에서 매일 돌을 나르고 땅을 파는 육체노동을 했다. 이 변방의 시골에서 그는 무려 14년의 청춘을 바쳤다. 하지만 그는 아무 불평없이 항상 낙천적으로 성실하게 일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드디어 승진의 기회가 찾아왔다. 간쑤성 건설위원회 비서로 추천받은 것이다.

이후 언제나 성실하고 겸손한 후진타오는 주변 사람들의 절대적 신임을 얻고 계속 승진하였고, 결국 13억 중국의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후진타오 주석이 변방의 밑바닥 생활에서 중국 최고 지도자의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가장 큰 비결은 한결같은 성실성, 겸손함, 낙천적인 성격과 더불어 어릴 때부터 연마해 온 탁구, 무용과 같은 매일 운동으로 다져진 기본 체력 때문일 것이다.

 


Behind Story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과 스포츠

미국에서 오래 생활했던 이승만 전 대통령은 야구를 무척 좋아했다. 1958년 메이저리그 야구 팀이 방한하여 열린 시범 경기 때는 시구를 하기도 했다. 골프를 즐기던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66년 태릉선수촌을 설립하여 전국체전을 활성화하는 등 한국 체육 발전의 디딤돌을 놓았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스포츠 마니아였다. 학창 시절 골키퍼로 활약했을 정도로 축구를 즐겼고 대통령이 되어서는 수시로 태릉선수촌에 들르거나 청와대로 선수나 지도자를 초청해 격려했다.

대한체육회장과 체육부 장관을 지냈던 노태우 전 대통령은 육사 생도 시절 100미터를 11초대에 달렸다 하여 별명이 ‘태릉 타잔’ 이었다. 특히 테니스를 좋아하여 가끔 테니스 국가대표 선수를 청와대로 불러 경기를 즐겼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조깅과 배드민턴을 좋아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수영을 즐겼으며 우리나라에서 열린 2002년 월드컵을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은 등산 마니아로 평소 산에 오르는 것을 즐겼으며 ‘체력은 국력이다’란 소신을 갖고 체육계 발전에 물심양면의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2003년 7월 대전구장을 방문해서 현직 대통령 최초로 프로야구 올스타전 시구를 했으며, 2007년 평창 동계 올림픽 유치 당시 과테말라까지 가서 IOC위원 약 60명과 일일이 접촉하며 지지를 호소한 유일한 국가 원수였다.


 

참조: 운동과 정치 리더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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